대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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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대조영
고구려는 시조인 동명성제에서부터 28제(帝) 보장 왕까지 756년의 긴 영광의 역사가 서기 668년 보장제 27년 9월 21일에 마감하게 된다. 고구려가 망하자 대조영 장군 일행은 남은 백성과 함께 시조이신 동명성제께서 건국한 태백산 너머 부여 땅으로 옮겨 고구려의 재활을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대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 장군은 무예가 출중할 뿐만 아니라 전기(戰機)를 잘 읽어 용병에 능했고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계략과 군략을 창출하는 등 어린 청년 시절부터 양만춘 장군 밑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내었다. 즉 20세 전후로부터 혁혁한 전공을 세워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예견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찍이 안시성 성주였던 양만춘 장군의 기대와 촉망을 받으며 아버지 대걸걸중상 장군과 함께 고구려 말기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연개소문 장군의 사후 후계 싸움이 일어나 고구려의 국력이 쇠약해 지는 바람에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 대조영 장군은 아버지와 함께 10여 년 동안이나 당군과 싸우다가 고구려가 망하는 바람에 부여땅 곤지로 피신하여 평생 투쟁하면서 마침내 진국(발해국)을 창건하게 된다. 그러다가 대조영 장군은 서기 719년 6월 7일 새로운 왕성 동경성 신축 현장에서 향년 71세로 숨을 거둔다. 이후 발해국은 14대 227년동안 만주를 지배하다가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게 멸망한다.
대조영 장군은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으며, 특히 천문령 대첩을 통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양만춘의 안시성 대첩과 함께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승리를 이끌었다. 이 값진 승리는 아버지 대걸걸중상의 군략과 대조영 장군의 군령에 따라 잘 싸운 군사들의 모두의 공이라 할 수 있다. 장군은 독불장군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버지 대걸걸중상 장군, 의형제인 걸사비우 장군과 미모사 장군, 갈시우 장군의 사이가 아주 각별하게 사이가 좋고 신임하며 목숨도 절대적으로 같이 할 정도로 함께 전장을 누비었으며 주변 관리도 엄격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진국을 세운 장군은 항상 그리고 먼저 넓은 초원에 수십만 마리의 가축과 말을 기르도록 하는 등 경제가 발전해야 국력이 신장된다는 획기적인 국력 배양책을 실천하였다. 농사를 비롯하여 모든 산업을 일으키고 국방을 튼튼히 해 모든 백성들이 일치 단합할 수 있도록 미리 미리 힘을 쓴 결과이다.
대조영 장군 이야기 중에 그의 아들인 2명의 왕자 이야기가 나온다. 누란바토르(몽골)에서 열한 살부터 생이별하여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대조영 장군의 큰 아들 무예가 돌아온다. 이때부터 둘째 아들 문예와 왕위 계승 문제로 갈등이 시작된다. 무예 왕자는 아버지와 함께 사냥에 따라 갔으나 산속에서 헤어졌다가 몽고의 족장 수우라이의 도움으로 살아났으며 그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말 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익히도록 하여 장수로 키워 주었다. 이것으로 보아 장자인 무예 장군은 역시 장차 국가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고 어느 누구도 알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발해국을 세운 대조영 장군은 당과의 화친을 위해서 장자 무예 왕자를 당의 수도인 장안성에 보내어 황제의 숙위(볼모)로 보내게 된다. 이미 대조영 장군은 당의 조정에 숙위를 보낼 왕자를 누구로 정해야 할지 선택의 혼란이 있었다.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숙위로 보낼 왕자로는 둘이 있었는데 장자 무예가 보위에 올라야 할 승계자이기 때문에 다음 순서로는 작은 아들 문예가 가야하였지만, 워낙 동생인 문예가 가기를 거부하였으므로 형이 양보하여 동생대신 가기로 자처하여 가게 되었다.
이는 이미 무예 왕자는 왕세자 위치에서 불리하게 될 수 있다고 짐작을 하면서도 오히려 그의 마음은 이미 우물안의 개구리에서 벗어나 당나라에서 견문을 넓여 선진문물을 배우고 다른 나라 왕자들과 친교를 맺어 그들을 통하여 각국의 정세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선견지명을 갖고 행한 행동이었다. 모든 직장인들은 눈여겨 볼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먼저 당나라에 동생대신 숙위로 가야 되는 불만 대신에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나라의 장래를 위해 스스로 노력하여 발해의 영재들을 당나라로 유학을 보내 10년 후 20년 후를 보면서 인재 양성에 앞장 설 수 있도록 성과를 거두게 된다.
두 번째는 상설 교역장을 마련하여 당나라 상인과 발해의 상인들이 일정한 장소에서 서로 만나 교통의 불편과 장거리 교역에 따른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면서 교역을 확대하니 물자 교류가 풍성하여 국력 신장에 커다란 보탬을 주는 엄청난 성과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하였던가. 일에는 언제나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튼튼하게 쌓아올린 제방도 개미 한 마리에 의해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으로 물이 새어 제방이 무너지는 수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무예 왕자가 당나라의 장안성에서 숙위로 잡혀 있을 때 여자 문제로 추문에 연루되어 누명을 쓰고 본국으로 소환되자 그의 아버지 대조영 장군으로부터 먼 지방인 압록책(지금의 신의주와 마주한 안동 지방)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무예 왕자는 마음 속으로 추문으로 인해 태자 자리를 완전히 포기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오히려 추방된 오지에서 실의에 빠져 낙오자가 되기 보다는 역발상으로 더 열정적으로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의 덕택에 힘입어 보잘것 없는 유배지를 그 정반대인 왕성한 무역항으로 발전시켜 교역량을 늘리고 그 지역을 번창시켜 국력을 발전시키게 된다.
결과적으로 한산한 어촌을 번화한 성으로 만들어 주었고 교역의 창구로 만들어 국고를 윤택하게 했으니 그의 아버지 대조영 장군을 닮아 함께 능력이 비상함을 누구나 칭찬하게 된다.
여기서 직장에서의 ‘선택’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해 본다. 직장인들은 항상 인사 발령과 근무 환경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직장인들은 인사권자의 명에 의해 본인 당사자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어떤 임무와 부서를 지정받게 된다. 대체로 만족보다는 불평이 앞 설 수 있다. 그러나 ‘비록 당신이 직장인으로서 어떤 자리에 어떤 임무를 맡길 것이가는 인사권자의 권한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더라도, 당신이 그 자리, 그 위치에서 어떤 방법으로 어떠한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항상 스스로 선택의 여지가 있다’라는 것이다.
가령 변덕이 심한 태도를 선택한 우울한 하루를 보낼 수도 있고, 또는 까다로운 태도를 선택해서 고객들과 동료들을 짜증스럽게 할 수도 있다. 반면에 밝고 즐겁고, 가벼운 태도를 선택한다면 멋진 하루를 보낼 수 있다. 각자 모두 어떤 종류의 하루를 직장에서 보낼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P51.에서) 여기서 직장인들이 필요로 하는 말 언제까지나 ‘창의성, 열정, 융통성, 성심성의를 다하는 자세’의 믿음을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