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의 평화적 혁명은 고르바초프가 주도한 소련의 개혁과정과 연관되는 것이었다. 그 당시 동독 당국은 오랫동안 모스크바의 개혁정책에 저항하다가 바르샤바 협정국가들 중에서 마지막 남은 국가로써 변화의 바람에 휩싸이게 되었다. 중부와 동부 유럽의 정치적 소용돌이는 1989년 11월 9일 동서독간
사회주의 강국이었던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되는 것을 보고 적지 않을 충격을 받고, 이를 대남 정책 수립에 반영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론에서는 한반도의 남북한 통일을 연구하거나 실질적으로 남북 통일을 위한 노력을 실행에 옮길 때, 동서독의 통일 경험을 주의 깊게 분
국가 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연방 11개 주는 각자 고유 헌법을 가지고 있었으며 주의회 선거를 통하여 독자적인 의회를 구성하였고, 주지사 및 각부 장관을 선출하였다. 각 주의 주지사는 의회에서 선출되며, 주 정치 ․ 행정의 중심 기관으로서 주의 정책노선을 결정하고, 각
통일을 지향하고 있다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24년 전 동서독 경제통합의 출발 조건이 어떠했는지를 간단히 살펴본다.
당시 각각 자신들이 속한 지역의 일반적 경제상황에 대한 질문에 서독인들의 77%는 좋거나 매우 좋다고 답한 반면 동독인들의 78%가 나쁘거나 매우 나쁘
국가는 동독과 소련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셋째, 동서독 관계 정상화를 위한 본격적 긴장완화 추진시기인 브란트 집권시기 ( 1969년~ 1974년)다. 이 시기에는 기민당과 사민당의 대연정 출범과 더불어 새로운 독일 및 동방정책을 추진시켰다. 국제정세에 따라 통일이 아닌 긴장완화에 정책을 맞추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