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산으로 도망쳐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서태후의 교묘하면서도 과감한 용인술을 엿볼 수 있다. 서태후는 개혁을 지지하였지만 격동의 시대에 최고 통치자로서 갖추어야 할 역량은 다소 부족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녀는 신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하여 많
서 가장 멸시받고 수탈 당하는 존재가 되었으며 몇 세기에 걸쳐 지속된 여성다움의 유교적 이상을 이 원칙의 예외라 할 수 있는 저명한 여성학자 반소(班昭 B.C 116 사망) 가 명확히 표현한 것에서 명확히 알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여성을 바라보는 악 조건 속에서 당당히 女帝가 된 측천무후와 서태후.
2) 첫 번째 입궁
(1) 측천무후의 아름다움
측천무후의 아름다움은 역사서에는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당·송 시대의 화가들이 그녀의 형상을 몇 폭 그렸는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으로는 당나라 장훤(張萱)의 <당후행종도>가 유일하며, 명나라 때의 ≪역대고인상찬≫,≪군신도감≫,≪삼재도회≫,
서 이홍장은 "밖으로는 화친하고, 안으로는 부강을 도모하면, 아마도 점차로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조정에 올린 상소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청나라는 이미 어떤 의미에서는 절대적으로 봉쇄된 국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서방새력은 문화적으로 중국을 침식할 뿐아니라
서 독립적으로 46년간 통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어떠한 인물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물론 그녀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비판이 모두 정당한 이의 제기인지 여성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퇴색된 업적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Ⅱ. 무측천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