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골『외투』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 이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이야기한 것으로 19세기의 고전적인 시각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말로 유명하다. 슬라브주의자의 대표적인 러시아문학의 대가 도스토예프스키가 고골의 ‘외투’에 대하여 이러한 평가를 내린 것에는 과연 어떠한
고골(1809~1852)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Голь
1830년대 이후 러시아 진보적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벌어진 러시아와 서구의 역할과 러시아의 미래에 대한 대립적 논쟁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서구파와 슬라브파는 러시아 지식인 사회에 이념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와 함께 문학은 시의 황금시대, 즉
러시아는 풍부한 천연자원과 우수한 인력 등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은 시장경제 체제로 이행 과정에서 나타난 많은 문제들을 극복해 나가는 과도기적인 단계에 있다. 최근 들어 경제적 혼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어 가는 양상을 보이면서 1997년 최초로 플러스 성장을 기록했
고골은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김나지움에서 수학하는 동안 학업성적은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보냈다. 바이올린을 배웠는가하면 미술지도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골이 적극적인 흥미와 관심을 갖고 관여했던 것은 문학과 연극분야였다. 시를 쓰는
극한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하려 몸부림치는 짐승에 가까운 존재들이 아니다. 유형지에도 봄이 오면 갖가지 꽃이 피어나듯 인간의 온갖 감정이 다 개화한다. 동료 죄수들의 웃음거리밖에 못 되는 나약한 쓰실로프를 그리면서 작자는 말한다. 나는 감옥에 와서 비로소 인간이 우는 것을 보았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