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선풍의 특이한 점은 합리주의와 휴머니즘을 표방한 르네상스의 최전성기에 휘몰아쳤다는 것, 이 선풍의 선두주자였 던 이들이 교황, 국왕, 귀족, 당대의 일류의 대학자, 재판관, 문화인이었다는 것, 마녀의 존재가 옛부터 존재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국가 그리고 공적 권위와 권력들이 전국적
마녀재판’ 혹은 ‘마녀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보헤미아의 교회혁신 운동 제창자 후스나, 백년전쟁 말기에 등장한 잔 다르크가 화형에 처해진 것도 그러한 대표적 사례이다.
마녀사냥의 선풍이 가장 거세게 불어 닥친 것은 1600년을 전후로 한 백년, 즉 후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운동의 시기와 정
마녀사냥의 특이한 점은 합리주의와 휴머니즘을 표방한 르네상스의 최전성기에 휘몰아쳤다는 것, 이 광풍(狂風)의 선두주자였던 이들이 교황등의 성직자의 일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국왕, 귀족, 당대의 일류의 대학자, 재판관, 문화인 모두였다는 것, 마녀의 존재는 옛날부터 존재해왔음에도
자신이 마녀라고 자백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세속법정이 마녀로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그들의 이익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더욱 잦아졌다. 이렇게 계속되던 마녀사냥은 르네상스의 진전으로 과학적, 이성적 세계관이 사회에 자리를 잡으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르네상스의 진전과 더불어 이성적 세계관과 과학 정신의 대두는 불가피한 시대정신이 되었고 이것은 신학에 기반한 과학의 해방을 의미하였다. 이로써 불합리의 극치인 마녀재판도 존립의 근거를 잃게 되었다. 18세기를 지나면서 마녀의 고문과 그에 따른 화형도 사라졌다. 이처럼 악마와 마법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