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론>(1513)은 이런 상황하에서 단숨에 쓰여졌다. 그러나 문필가로서의 그의 명성을 더욱 높였던 것은 희극 <만드라골라>(1518)에서였다. 1520년 무렵부티 마키아벨리와 메디치가와의 관계가 호전되기 시작했는데, 그 한 예가 <피렌체사> 집필 의뢰였다.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줄리오 데 메디치가 교황 클
군주의 모습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이탈리아의 위기를 해결하려 한 듯하다. 사회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사람은 군사력과 지도력을 가진 전제 군주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사회 혼란의 해결점을 강력한 군주에서 찾았다.
이상적 군주와 군주국에 대한마키아벨리의 논의는 크게 네
마키아벨리도 특히 이러한 사태에 대한 책임이 교회에 있다고 생각했다. 교황 스스로가 이탈리아를 통일하기에는 너무 힘이 약하면서도 다른 어떤 통치자가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것을 방해하기에는 충분할 만큼 강하였으며 교황의 국제적 관계는 그로 하여금 외세 개입을 초래하는 못된 정책의 우두
공화정을 토대로 형성되었으나, 이후 대내적․대외적으로 위기를 겪으면서 정치권력이 중앙에 집중되면서 참주정의 형태를 띠었다. 피렌체는 자주성을 잃고 끊임없이 프랑스, 에스파냐 등 주변 강대국의 침략과 개입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살고 있던 마키아벨리는 보다 안정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추방되고, 설상가상으로 1513년 2월에는 메디치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되기에 이른다. 1513년에 특사로 석방되자,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로 하여금 자신이 능력 있는 인물임을 명확히 인식시키게 위해 "군주론"을 집필한다.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