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
1. 호락논쟁의 배경
호락논쟁(湖洛論爭)은 18세기 중, 후반에 발생하였다. 그러나 사학(史學)계의 의견을 참고하면 호락논쟁의 맹아(萌芽)가 이미 양란 이후 발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락논쟁이 기호학파(畿湖學派), 정치적으로는 노론(老論) 내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미발의 심체는 과연 순선한 것이냐 악할 수도 있는 있느냐 등의 문제에 이르러 서로의 견해를 주장한 것이다. 이들의 견해차는 점차 확대되어 호서지방의 학자들과 낙하지방의 학자들의 학문적 대립으로 이어지게 되어 사단칠정논쟁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을 특징짓는 양대 논쟁이 될 만큼 중요한 논쟁
1. 리(理)와 기(器)의 선후관계
주자의 형이상학은 주렴계의 태극도설을 골간으로 삼아 장횡거가 논한 ‘기’, 이정이 말한 형이상, 형이하 및 ‘리’와 ‘기’의 구분 등을 융합했다. 따라서 주자의 학문은 이전 도학자들의 학문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리학에서 가장 큰 문제는 ‘리(理)란
1) 이간을 비롯한 동론(同論)
- ‘성즉리(性卽理)’라는 명제에 근거를 둔 본연지성의 차원에서 말하면 인간과 사물은 모두 동일한 오상을 지닌다고 주장
2) 한원진을 대표하는 이론(異論)
- ‘중용’의 ‘솔정지위도’를 전거로 성과 도가 일치함을 주장
- 성은 곧 재기(載氣)의 리라고하여 ‘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