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세력의 움직임도 활발했다. 각 대학에서도 시위가 확산됐고 20일 서울역에서는 20만명가량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신군부의 독재를 막는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5월18일 0시를 기해 신군부는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5.18은 한국경제의 불황이라는 위기와 함께 10.26이후 힘의
사망자 163명
행방불명자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와 같은 5.18의 핵심적인 진상은 밝혀지지 않으면서 5.18이 발생한 지 한 세대
2) 전개과정
광주민주화운동의 전개과정은 다섯 국면으로 구분된다. 제1국면은 5월 18일 학생시위에 의한 항쟁의 발단기이다.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사전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18일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집결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강력한 저지로 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
광주항쟁을 재현하고 더 나아가 계속투쟁에의 메시지를 전한다. 무엇보다도 그가 의도한 가장 중요한 상징은 제목에 있다. 그는 ‘광주’를 전 세계의 자유, 민주화와 평화를 위해 싸우는 모든 사람과 시대의 모범적 모델로 상징화시킨 것이다.
이금자의 시 <이 오월에>는 겨우 한 해 지난 1981년 생생한
한국에서 민주화를 향한 움직임은 그 뒤 수년 동안 철저히 저지되었다. 또한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장군의 신군부가 한국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함으로써 ‘서울의 봄’이라고 일컬어졌던 한국에서의 단명했던 민주화의 과정은 갑자기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 다음날인 5월 18일 광주의 학생들과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