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트리아로 떠난다.
기원전 327년 박트리아를 평정하며 지역 유지의 딸 록사네와 결혼한다. 박트리아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동진하여 인도 쪽으로 진군했다. 인더스 강을 건너 히다스페스 강에 이르러 포로스왕이 이끄는 코끼리군단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으나 격파한다. 이 전투에서 애마 부케팔레
이란에 페르시아 제국이 성립된 BC 6세기에 이미 박트리아"소그디아나"코라즈미아 왕국 등이 있었으며 시르다리야 방면에는 샤카족(이란계 유목민)이 진출해 있었다. 오아시스의 주민도 이란계였는데 이들은 대상으로 활약하여 문화적으로는 이란의 유파(流派)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인도와의
박트리아 사람들 가운데 사는 우리의 (기독교)자매들은 낯선 사람과 교제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인데, 여기서 길란은 카스피 해 서남족의 해안지역을, 박트리아는 아프가니스탄 북방, 즉 힌두쿠시 산맥과 아무 다리야 사이의 지역을 가리킨다. 김호동,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까치, 2002), 106.
서
명에 달하는 페르시안 군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 본다.
이러한 전략적 이점을 포기하고 다리우스 3세는 자신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십수만의 군사를 일으켰다. 중앙아시아, 박트리아, 인도 등지에서 군사(용병 포함)를 끌어모은 것이기에 이곳에서의 패배는 페르시아의 몰락을 의미했다.
박트리아 왕국 등 동방의 여러 나라를 정벌하면서 도망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제를 끝까지 추격한다. 결국 다리우스는 부하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여 사실상 동방은 그의 영토가 되었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야심은 끝이 없었고 끝날 것 같던 동방원정도 계속되었다. 그는 멈추지 않고 부하들의 반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