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역시 건국 직후 돌궐과 통교하여 대외적 안정을 구하였으므로,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당의 예종이 즉위한뒤 돌궐의 묵철가한이 당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구하니, 당은 공주를 강가함으로써 돌궐과 우호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후 당과 발해의 교섭은 이전과 같이 돌궐의 저지를 받지 않게
사적으로 한강이북의 중국지역을 침범해왔다고 부연한다. 또한 “中韓相關姓氏族源考論”에서는 오늘날 한국의 상당수 성씨 기원이 중국이라고 주장한다. 덧붙여 “中國東北古民族發展史”에서는 우리민족의 한 뿌리인 예맥족을 중국민족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箕子與箕子朝鮮硏究”의 결론은
925년부터 고려로 망명하는 발해인들이 증가하였다.
이런 시기에 발해의 중앙정부는 강력한 요나라의 등장으로 국가 존립이 위험에 처하자,여러 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고려와 정략적 혼인을 하는등 외교적으로 노력을 하지만 막상 요의 침공때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였다.
919년 요나라는 발해의
사는 1만명 이상이 되었다.
(1)발해의 정치적 발전
발해의 건국
696년 영주에서 이진충의 난(거란인으로 거란국을 세우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1년만에 실패한다.)이 일어난다. 이들 지역은 여러 민족이 생활하는 곳이라서, 한족에 대한 반발 심리가 많았다. 당시 강제
1.선사 시대와 철기 시대의 생활
구분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
시기
약70만년 전
기원전 8000년경
기원전 10세기경
기원전 4세기경 보급, 기원전 1세기경 확대, 보급
중요
뗀석기
간석기,빗살무늬토기,가락바퀴,뼈바늘
청동검,청동거울,반달돌칼,
철제무기,철제농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