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재해의 피해를 겪는다.
북한이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자체 문제로 만성적인 식량부족을 겪고는 있었지만 198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냉전시기에는 구소련과 중국 등의 동맹국으로부터 유료나 곡물을 무상지원을 받거나, `우대가격`이라는 조건으로 국제가격
북한의 식량수급 상황에 관한 믿을만한 자료 자체가 없기 때문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추정에 의존하여 북한의 식량난 실태를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 북한의 식량위기가 한계상황에 이르렀다고 전제하더라도, 북한정권과 북한주민을 보는 관점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대북정책이 제시될 수 있
대북 인도적 지원 』 ( 평화아카데미 2009 강연집 ) p.2
1,550kcal 정도이다. 북한의 이러한 생산량에 따라 1994년부터 정기적 배급이 중단되며 아사자가 발생했다. 김일성이 사망한 94년부터 98년까지 5년간, 짧게 잡으면 95년~97년까지 3년 동안 북한에서 식량난이 직,간접적 원인이 되어 아사, 병사, 장기 영양
북한농업의 생산성을 크게 떨어뜨린 것이었다.
북한의 식량난과 전반적인 경제침체는 남북한 관계와 대외관계, 북한 내부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식량난으로 인한 북한의 붕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남한정부는 다각적인 대북지원 정책이 불가피했다. 북한의 식량난은 남한정부로 하여금 적극
식량문제는 체제유지에 대한 장애요인은 물론 한반도 안정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이 시기 남한 및 국제사회의 대북정책에 있어 주요 현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식량난으로 인한 북한의 붕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남한정부는 다각적인 대북지원 정책이 불가피했다. 북한의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