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는 여자는 정사에 간여 할 수 없다는 청조의 규칙을 의식하면서 정무를 배웠고, 함풍제에게 조심스럽게 자기의 의견이나 계획을 말하곤 했다. 함풍6(1856) 애로우호 사건으로 영국․프랑스 연합군과 천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었지만 비준서 문제로 함풍 10(1860) 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하였다.
북경을 점령했을 때, 서태후와 광서제는 북경을 떠나 서안으로 피신해 있었다. 의화단 잔여세력은 여전히 각지에서 기독교도와 마찰을 빚고 있었고, (下關條約하관조약)으로 인한 거액의 배상금은 농민의 몫이 되어 농민의 항세운동이 수없이 발생하였다. 게다가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하여 관
서 근대화의 추진력은 기본적으로 정부로부터 나와야 했다. 당시 청조는 정부 주도의 근대화를 잘 이끌어야 하는 동시에 열강의 침탈을 막는 두 가지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태평천국(太平天國)이후 청조(淸朝)가 멸망에 이르기까지 50여년 간에 걸쳐 실질적으로 청조를 지배해온 인물 서태후(西
서 아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청나라는 아편 단속으로 마약상들을 홍콩으로 쫓아냈다.
청나라의 아편 단속에 반발한 영국은 무역항을 확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1842년에 영국의 승리로 종결되었고, 영국 측은 베른 조약 체결과 홍콩의 할양, 광둥 이외의 다섯 항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