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을 두기 시작하였고, 이는 자연스럽게 경세치학의 비중을 키웠다. 이 와중에 남인, 몰락한 북인, 잔존한 훈구파 등 다양한 정치세력의 합류로 학문의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는데, 화담학파가 연구하던 소옹(邵雍) 상수학(象數學)이나 역학, 잡학 등 국정 운영에 필요한 학문의 발전을 가져왔다.
심체유선악 논쟁’, ‘성범심동이 논쟁’을 중심으로 호론과 낙론의 견해를 비교분석한 후, 조선 후기 사회사상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써 볼 것이다. 이는 조선의 기본 인식이었던 성리학의 이론 세계의 특성을 알게 되는 것 뿐 아니라 그 당시 사회 상황과 조선 선비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좋은
심체설, 그리고 성인과 범인의 마음의 동이에 관한 성범심동이설 등의 문제에까지 확대되었다. 이대희 外,「조선조 후기의 인물성동이논변에 대한 학제적 연구 」,『철학논총』제54집, 새한철학회 2008.
이간이나 한원진은 기호 지방(충청도)사람이었다. 그러나 이후 이간의 설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주
무씨는 눈으로 훔쳐보니 조기에 이미 매우 뜻에 맞아 한번 시침을 하게 하니 말로 다 할 수 없는 부드러움과 묘사를 다할수 없는 사로잡힘을 다하니 설회의도 이런 운치가 없고 심남구도 또한 형체가 더러움이 부끄러울뿐이다.
武氏生平, 從未經過這般??, 此番天緣相湊, 幸得這個妙人兒, 遂不禁百體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