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졌다. 또한 훈민정음의 창제,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貢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해 민족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이 많은 일들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세종이었
세종은 신생 해 지방 호족들의 관할 구역이자 세력 거점인 임내를 모두 없애고 수령이 직접 통치하는 300여 개의 군현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했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닌, 전략적으로 문치의 방법을 써서 서서히 물들여나가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사업을 통해 그보다 중요한 것을 얻었
그리고 도덕적이고 유능한 재상에게 국정을 맡기는 권한위임의 정치 등이었다.
세종의 경우 즉위한 이후 약 20년간 거의 매일 경연에 참석하여 경사(經史)를 강론했으며, 언관과 유생들의 각종 아이디어와 정치비평을 들었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재상에게 전임하는 국가운영” 즉 ‘의정부 서사
구별 없이 1결에 30두를 거두었는데, 이는 1결에서 생산되는 최고 수확의 1/10을 표준으로 하여 정한 액수였다. 이러한 세율의 규정을 정하기 위하여 조선은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시행하였다.
답험 손실법은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에 행해진 세율 규정법으로 공법이 공표 될 때까지 시행 되었다.
세종대왕이 어떤 식견을 가지고 어떻게 조직에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무슨 고민을 했고 어떤 노력들을 기울였는가를 알아봄으로써, 우리는 젝 웰치나 빌 게이츠 같은 서양의 경영자가 아닌 '한국인으로서 한국인을 가장 잘 경영했던 인물’에 대한 모범적 사례를 발견하게 된다.
시대의 변혁을 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