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산리고분군'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국가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이들 무덤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6호 무덤'이었다. 6호 무덤은 다른 인근의 무덤과는 그 규모나 형태, 그리고 건축 재료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이 무덤은 정교하게 제작한 무늬 벽돌을 사용하고 지하에 아름다운 아치형 곡선
Ⅰ. 서울의 문화재
1. 문화재의 명칭 구분이 불명확하고 불필요한 내용이 포함되어 표기된 경우
보물 제385호의 문화재 명칭은 ‘명정전 동회랑 및 명정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국보 제266호로 ‘창경궁 명정전’이 별도로 지정되어 있다. 따라서 보물 제385호의 명칭에서 ‘동회랑’의 ‘동
서설
1971년 봄. 아주 우연한 계기로 건국이래 최대의 유적 발굴이 시작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끝난 그 발굴은 당시 엄청난 기자와 사람들이 모여들어 모두들 제정신이 아닌 가운데서 이루어 졌다고 한다. 더욱이 한 기자의 실수에 의해 유물중 하나인 청동숟가락이 부러지면서 유적을 보호하려는 발
Ⅰ.서설
1971년에 발굴된 무령왕릉은 백제 제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으로서 발견당시 전혀 도굴되지 않고 매장당시의 모습 그대로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삼국시대의 무덤 중 유일하게 그 주인을 알 수 있는 무덤으로서 이의 발굴은 당시의 국사학에서 뿐만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크나큰 의
3) 계룡산 종교들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계룡산 신흥종교의 계보가 대개 동학과 정역에서 전승되었고, 거기에 도참풍수적 신앙이 강력하게 융합되어 형성되었다. 그런데 해방 후 고유사상에 의한 신흥종교만이 아니라 기독교적 신흥종교들도 기독교의 한국화 또는 토착화의 일환으로 발생하게 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