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제21회 FIS 총회에서 한국은 국제스키연맹의 정회원 국으로 가입하였다. 1960년 미국 스쿼베리 동계올림픽에는 신업재 회장의 노력과 이상백 박사의 협조로 신업재 감독, 김용구 코치, 임경순, 김하윤 선수가 처음으로 출전하였다. 그러나 세계의 무대와는 너무나 큰 기술의 차이 때문에 경기 성적
스키도 부흥이 빨랐던 프랑스에서는 재빨리 전쟁전을 능가할 정도로 왕성하게 되었다. 한편 전쟁후의 부흥이 늦은 오스트리아에서도 1950년경부터 젊은 선수가 활약하기 시작하여 독특한 기술을 내놓았다. 이것은 바인슈필기술이라고 불리 우며 나중에 「오스트리아․스키술」로서 공표되었다. 세
스키장이 생겼다.
1930년대는 온정리 스키구락부가 탄생된 때이다. 1930년에 발족한 조선스키 구락부 이사로는 이길용 씨, 조선스키연맹 고문으로는 김시권 씨가 활약하였다. 1930년 원산삼방 스키대회에서는 140여명의 스키선수 중 10여명의 조선학생이 참가하였으며, 1933년 명천스키장에서는 일본인 강
경기에 참가한 최초의 우리나라 선수였다. 그후 스키경기가 점차 보급되었고 1946년 조선스키협회가 창립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에 따라 명칭을 현재의 대한스키협회로 바꾸었으며, 1947년 2월 지리산 노고단에서 제1회 전국스키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는 선수 70여명이 참가하였는데 기술
스키였다. 이것은 활주와 턴을 쉽게 하도록 길이를 다르게 만들었다.
스키경기는 1830년대 후반 노르웨이에서 주로 크로스컨트리 경기와 점프 경기가 많이 개최되었으며, 알파인 경기는 턴기술의 발전과 함께 개최되기 시작하였다. 노르웨이 Telemark 지방의 S. Norheim 선수가 개발한 기술이 오늘날 Telem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