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지 역시 발행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완용 내각의 대변지였던 <대한신문>도 8월 30일자로 <한양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었다가 31일자를 내고 종간했다.
이에 앞서 통감부는 그 동안 한국 침탈의 선전 매체로 활용해 온 일인 경영의 신문에도 손을 대 서울에서 발행되던 일인 신문을 모두 정리했다. 1910
언론에 대항해 일제의 침략정책을 대외적으로 선전.
- 당시 일본인, 중국인을 제외한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700여명
으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지만, 총독부는 적자를 감수하면서 발행.
매일신보
- 한일합방 전인 1910년 5월에 베델의 <대한매일신보>를 매수. 한일합방 이후 <매일신보>로 바
장지연은 대표적 항일 언론인으로 추앙받아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았다.
그러나 정부는 5일 김황식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장지연의 서훈을 취소했다. 지난해 말 국가보훈처가 친일행적이 드러난 장지연 등 19명의 서훈 취소를 요청한 데 따른 후속 조처다. 이날 서훈이 취소
상황 속에 놓겠다는 화두 아래에, 현대 미디어법은 최고의 뜨거운 감자라고 할 수 있다. 일본, 미국에 이어 7.80년대 군사 독재 상황 속에서 많은 언론 자유, 표현의 자유가 박탈되어졌었지만 노태우 정권을 시작으로 해서 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는 많은 언론자유를 획득했다고 할 수 있다.
Ⅰ. 윤치호의 생애
1. 청년기의 윤치호
정치가로서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호는 좌옹(佐翁)이다. 충남 아산(牙山) 출생이다. 그의 집안은 18세기 중엽까지 명문 양반가문이었으나, 그뒤 향반(鄕班)으로 몰락했다가 아버지 때에 이르러 가세가 재건되었다. 아버지는 무관출신으로 군부대신을 지낸 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