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록은 독도와 울릉도의 관계를 뚜렷이 밝힌 세계 최초의 문헌으로 평가되며 세종 14 년(1432년)에 편찬된 신선입도지리지를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머리에 밝히고 있다.
1693년
자산도로 호칭. 동래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가 잦아지자,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역사적 자료가 빈약한 형편이지만, 남아있는 유물들로 짐작해보자. 현재 울릉도에서 찾아낸 유물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갈색무늬토기(승문토기)라고 한다. 이 시기는 기원후 약300년무렵(서양 :로마시대, 우리나라 :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인데, 경상남도 바닷가에서 발견되는 김해토기와 같은
귀복되었으며, 고려에서는 행정 구역에 편입시키고 백성을 옮겨살게 하는 등 울릉도와 독도 경영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었다. 조선시대에는 독도를 '우산도', '삼봉도', '가산도', '가지도'등으로 불렀다.조선은 한때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모든 섬에 공도정책을 폈다.
조선시대에는 독도를 '우산도', '삼봉도', '가산도', '가지도'등으로 불렀다.조선은 한때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모든 섬에 공도정책을 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가 잦아지자,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
시대정신의 정화(精華)를 찾아낼 수 있다. 옛 고전을 공부하여 현재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앞날을 창조적으로 조망하는 힘을 기를 수 있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충남 대전 출생으로 그의 역사연구에도 심오한 신견을 가지고 있어 고조선(古朝鮮)과 묘청(妙淸)의 난(亂)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