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제 사후 중국의 대항해 정책은 계속되지 못했고 유학자 세력들은 정화 함대의 기록을 말살하는 데 일조했다. (중화사상은 “중국은 지대물박(地大物博)하여 없는 것이 없고 이미 문화적으로도 성현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다른 미개한 나라에서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고 정화
1.정화는 누구인가?
정화(鄭和 1371~1434)는 중국명나라 환관으로 원래 마씨(馬氏)가의 2남 4녀 중 둘째 아들 이었으나 1404년 초에 영락제인 연왕(燕王) 주체가 그에게 정씨(鄭氏)성을 하사하였다. 그렇다면 정화는 왜 환관이 되었고 어떻게 영락제에 의해 중용될 수 있었을까?
정화의 할아버지는 마하
영락제의 치정에서 가장 현저한 것은 주변지역에의 대규모 정벌과, 그것에 의한 명나라 국경의 확보이다. 즉, 동북지방에서는 헤이룽강[黑龍江] 하류에 누르간도사[奴兒干道司]를, 백두산[白頭山, 중국명창바이산(長白山)] 북쪽에 건주위(建州衛)를 두었다.
그 뒤로 많은 위소(衛所)를 두어 여진부족
연왕 주체(후 영락제) 섬긴 환관
▶ 영락제의 명을 받아 남해 대원정
(1405-1433, 총 7차)
▶ “신장 9척(180cm),
허리둘레 10위(150cm), ……
걸음걸이는 호랑이와 같으며,
음성은 낭랑하다.”
- 명나라 초기 관상가 원중철
정화 함대의 규모
“남해로 항해한 배들은 마치 집채와도
항해 시대’라 일컬는다.이슬람 상인이 교역에 이용한 다우 선은 가장 큰 것이 300톤 쯤 되었는데, 적재량이 180톤 쯤 되었다고 한다. 한 척의 다우 선이 600마리의 낙타가 짐을 짇고 사막을 여행하는 것과 맞먹는 상품을 수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이는 유라시아에서 대량 수송 시대가 시작된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