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1표제나 대의제가 아니라 ‘단위투표제’ 또는 ‘집단투표제’였다. 트리부스회와 켄투리아회에서 각자가 투료를 하기는 하되, 과반수를 넘는 것이 그 소속집단의 결정표가 되었다. 따라서 1표로 계산되는 투표단위는 트리부스회에서는 트리부스, 켄투리아회에서는 켄투리아 였다.
3)집정관
민회를 통해 중대사를 비준할 뿐이나, 원로원은 이에 대한 거부권을 가지며, 민회의 소집도 집정관의 권한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로마는 대외적으로 팽창을 해나가야 했기에 군대의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의 위치가 점차 중요성을 더해가던 때였다. 따라서 초기 공화정하의 로마는 정복전쟁의 시기
.
- 부족회 : BC5세기 후반(BC471) 푸블리우스 법에 따라 평민회는 부족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재산정도에 상관없이 귀족이나 평민 모두 참석하였으며, 호민관이나 집정관, 법정관에 의해서 소집될 수 있었다. 입법권은 없었으나, 켄투리아회나 원로원에서 인준된 법안의 가부를 결정할 수 있었다.
로마가 왕정을 채택하고, 그 말기에 에트루리아인이 지배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왕은 군사, 정치, 제사(祭祀)의 여러 권능을 집중시켜 절대적이며 무제한적인 강력한 임페리움[命令權]을 가졌으나, 사실은 원로원, 민회(民會)가 이것을 제약하여 동방에서와 같은 왕권은 발달하지 못하였다.
※ 원
로마의 역사
1. 이탈리아 반도
장화를 닮은 이탈리아는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서쪽 아드리아 바다를 건너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 반도는 그리스 역사무대의 밖에서 원주민들과 신흥 도시국가 에트루리아의 세력, 그리스의 상업도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던 지역이었다.
에트루리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