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관(留守官)의 지배를 받았다. 그런데 서경에는 동경, 남경과 달리 유수관 외에 독자적인 관부가 존재했다. 서경 정부는 일종의 총독부인 서경유수관과 일종의 자치정부인 서경관의 이중구조로 되어있었던 것이다. 이 이원적 구조는 서경을 우대하면서 견제하기 위해 탄생했는데 두 부류의 기반이
慶尙道의 성립
『慶尙道地理志』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三韓을 통합하고 비로소 東南海道部署使를 두었다고 하였으며, 그 후에 慶尙晋安東道, 慶尙州道, 慶尙道 등으로 각각 고쳤으나 그 개칭의 연대는 미상이다”고 하였다. 그 개칭의 연대에 관해서 『世宗實錄』地理志에서는 대략 아래와 같이
유수관주인(桃花流水館主人)이고 그의 저술은 친구인 김려(호; 담정)가 교정하여 《담정총서(潭庭叢書)》 안에 수록한 11권의 산문과 《예림잡패》에 시 창작론과 함께 남긴 이언(俚諺)65수가 전한다.
11권의 산문은 각각의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문무자문초(文無子文草> ·<매화외사(梅花外史)> ·<화석
남경(南京) 설치
남경설치 원인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의 주장이 있는데 풍수도참사상에 의하여 설치되었다는 설과, 지정학적인 이유로 설치되었다는 설, 그리고 남경 정치세력에 의하여 설치 되었다는 설 등이다. 『고려사』『지리지』에 의하면 남경유수관 양주의 지역은 원래 고구려의 북한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