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南京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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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南京설치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남경(南京) 설치
남경설치 원인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의 주장이 있는데 풍수도참사상에 의하여 설치되었다는 설과, 지정학적인 이유로 설치되었다는 설, 그리고 남경 정치세력에 의하여 설치 되었다는 설 등이다. 『고려사』『지리지』에 의하면 남경유수관 양주의 지역은 원래 고구려의 북한산군이고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는 한산군으로 되었다. 『高麗史』 卷 56, 志 10 地理 1 南京留守官 楊洲.
라고 하여 고려 이전에 국가와 시기에 따라 남경지역에 대한 명칭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1. 풍수지리설의 개요
고려시대 남경의 풍수와 관련하여 김위제(金謂)가 숙종 2년(1097)에 상소를 올린바 있다 신라말에 당에 들어가서 「秘記」를 써서 전한 도선(道詵)의 술을 배워, 남경으로 환도하기를 청하며 올린 상서에서 “도선기에 이르되 고려의 땅에 삼경이 있으니(중략) 개국 후 160여 년에 목멱양에 도읍을 한다고 하였으니 신은 이때가 정히 새 서울에 순주할 때라고 생각하나이다 『高麗史』 卷 122, 列傳 35 金謂.
.” 라고 하였다. 이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남경의 자연지리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고 하겠다. 풍수지리사상이란 풍수지리설과 도참사상이 합쳐진 것이다. 풍수지리설은 땅에도 생명력이 있어 죽은 자와 산자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 학설로, 현재까지 우리 민족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고 특히 난세(亂世)에는 더욱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 고려 인종 때 우리나라에 왔던 송의 서긍(徐兢)은『高麗圖經』에서 고려의 풍수 사상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고려는 본디 글을 알아 도리에 밝으나 음양설에 구애되어 꺼리기 때문에 그들이 나라를 세움에는 반드시 그 형세를 관찰하여 장구한 게책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확신한 연후에 자리를 잡는다. 『高麗圖經』卷 3, 地域 形勢
2.지리적인 배경
풍수도참사상과 함께 남경을 건설하는데 있어서 지리적인 배경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주 지역은 한강을 접하고 있어 수로를 이용한 조운에도 유리한 지역이었다. 한강은 한반도의 중부 하천으로 연평균 강수량과 평균 기온이 비교적 쾌적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하류의 충적평야지대에는 일찍이 농경생활이 이루어져 왔다. 그리고 특히 이 유역은 산과 들, 바다가 한데 어우러져 지역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며, 남북이 교차하는 한반도의 주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항상 남북세력이 충돌하거나 완충하는 지대가 되었던 것이다.
3. 정치적 배경
남경은 청치세력에 의해 설치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새로운 세력 및 근거지를 요구한 문종과 그에 부응한 남경출신 세력에 의해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문종 이후에 일시 폐지 된 이유도 남경출신 세력들이 문종 후반 이후 지속되지 못한 반면 인주이씨는 지나치게 강성해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새로운 근거지로 남경을 키우겠다던 왕의 의도는 수정을 요하게 되었고, 동. 서경 출신들의 반대도 있었기 때문에 폐지된 것이라고 하였다. 숙종은 인주이씨의 독주를 막고 서경세력의 확대를 막기 위하여 남경 설치를 강행하였다고 하였다. 기존의 풍수도참사상의 영향으로 설치되었다는 주장과는 다른 방향으로 쓰여진 글로 새로운 시각으로 남경을 보았다는 점에는 주목되나, 인주도 남경의 령현이었던 점으로 보아 인주이씨의 세력이 강대해지고 남경세력이 약화되어 그로 인해 남경이 폐지 되었다는 것은 의문시된다.
숙종의 남경의 건설
한편 남경 건설에서도 숙종의 리더쉽 강화와 개혁의지를 살필 수 있다. 숙종원년 김위제가 풍수도참살에 의거하여 국력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남경을 건도하고 순주해야 한다고 건의하고, 4년 8월에 다시 재신과 일관이 남경 건설 건의를 거쳐 계획이 구체화 되었다. 그해 9월 왕이 현지에 직접 행차하여 땅을 살폈으며, 이어 6년에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고 9년에 왕궁을 완성하였다. 고려는 개경 외에 서경을 두어 분사(分司)를 설치하고 왕이 순주하는 등 중시 하였는데, 고려 중기에 왕들은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신령을 반포하여 국정을 쇄신하겠다고 표방하고는 했다. 김위제의 건의문에서 살필 수 있듯이 남경 건설과 순주 역시 갱시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회변동기적 상황과 숙종이 즉위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생긴 정치적 불안정성을 왕이 주동적으로 돌파하려는 의도에서 추진한 것이었다.
그런데 서경은 국초 이래 북방정책과 연결되고 그 북부지역을 개발하는 전진 기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에 비하여 남경 건설은 중부지방을 개발하고 수도 배후에 복심을 육성한다는 의미가 있다. 특히 남경지역은 현종계 왕실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현종이 즉위 하기전에 김치양일파에게 핍박을 받아 승려가 되어 박해를 피했던 사찰들이 그곳 삼각산에 있었다. 이후 왕들은 삼각산에 행차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大覺國師文集』 권 19. 詩 三角山仁壽寺禮文殊聖像의 註 “自德王而下 代代行幸”
그곳의 사찰들에 행차하여 현종계 왕실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안녕을 기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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