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수립선언)의 “국무총리”, 1차 개헌에서 “대통령”역임
6.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미 외교활동 벌임“구미위원부(워싱턴)”
7. 1921년-위임통치론 : 일제시대 미국대통령 앞으로 일본을 대신하여 국제연맹이 조선을 위임통치해 줄 것을 청원 (☞의문: 과연 이승만은 진
고찰 1 - 한반도의 장래를 스스로 결정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었는가?
당시 38선 이남에는 온건좌파인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라는 자치조직이 구성되어 있었다. 여운형의 건준은 미군이 진주하기 전까지 치안 유지 및 행정활동을 수행한다. 조선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는
이승만의 정권이 거꾸러지고 난 뒤에서야 비로소 4·3에 대한 조명했었던 것이다. 이러한 4·3에 대한 진상규명 및 지속적인 관심은 7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가능해졌고, 80년대에 들어서 미군정의 조사 보고서의 발견과 더불어, 이에 따른 학계에서의 관심이 4·3 사건을 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조선건국동맹의 여운형, 미국에서의 외교활동 중심의 이승만과 유격대 활동의 김일성과 통일전선운동의 김두봉의 다섯 명의 좌우 정치 지도자들을 살펴보고 좌우의 합작 노력과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 세계정세 속 인물별 사건과 논쟁점들을 고찰 해봤다
이들의 노력을
전쟁을 계속 수행 할 수도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바로 미국의 이러한 정책적 제약을 이용하여 북진통일의 기치를 높임으로써 대미 안보 협상에서 성공적으로 미국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사료13 이승만이 미 대통령에 보내는 편지, 사료15 미 국무부 회의 비망록)
대한원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