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회 조선 기독교 남부대회 (1945. 11. 27~30)
11월에 서울 정동교회에서 기독교 조선 남부 대회가 다시 소집되었다.
이 대회에서 임원진을(회장 김규식) 선출하고 일제 강점기 순교자에 대한 추도회를 갖고,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남부대회는 선교사 내한을 요청하고 38도선 문제의
제 잔재 청산에 실패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규, “해방 후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4호, 1995, 12, p.88.
친일적 성향의 교계 지도자들은 해방 이후 이승만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였고,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통해 성립된 이승만 정권은, 그 정통성 문제
이승만 집권 시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양상을 정리하고, 그 양상의 바탕에 대하여 이승만 정권이 내세웠던 주요한 이념적 토대 중 하나인 ‘유교’에 중점을 두고 분석하고자 한다. 따라서 발표의 기본적 문제의식은 ‘유교가 이승만 집권 시기에 왜, 그리고 어떠한 모습으로 한국사회에 영향을
이승만-신화에 가린 인물-』, 건국대학교출판부,
이제까지의 한국의 역사학, 정치학에 있어서의 인물 평가는 한 인물을 긍정적으로 볼 것이냐, 부정적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인식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결과 또한 그러한 방향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위원회도 참여한다.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도진순, 64쪽
그러나 이승만과 미군정의 계략에 의해
비상국민회의 정무위원 28인 모두가 민주의원이 되면서 비상국민회의는 미군정의 자문위원단의 성격으로 바뀌게 된다.
제 1차 미소공위가 실패로 끝나자 미국무부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