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구조였다. 후기에 이승만이 늙어 자유당의 과두세력이 실제권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이승만에게 개인적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정책결정은 이승만(뒤를 이어 그를 대행한 이기붕)의 개인적 선호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만큼 비효율과 혼란에 빠졌다. 이승만의 정치권력은 이들이
과정은 자본의 논리를 민중적 대항 이데올로기의 담화로서 극복하고 권력과 자본에 의한 사회질서가 아닌 민중 중심의 민주주의에 의한 사회질서로의 재편이 절실하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극단적으로 대립된 양 체제의 정치사회적, 문화적 구조를 공동된 진보적 사회발전으로 지향할 때만이
정치를 수행해 나가고 또 스스로의 권력기반을 구축해 가는 과정에서 구체화되었다.
우리는 5·16을 비합법적인 군사쿠데타로 정의하고, 20여 년간의 집권기를 통해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던 비민주주의적인 정치형태에 대하여서는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가경제부분과 같은
정치체제와 경제정책에 대해 국민은 엄중한 경고를 내린 것이다.
제10대 총선결과는 유신정권의 유화책을 이끌어내어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가 1978년 12월 27일 형 집행면제로 석방된다. 그리고 1979년 5월 29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선명야당을 표방하는 김영삼 - 김대중의 연합세력이 신민당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