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수뇌부는 전쟁 발발 직후 일주일 동안 1, 2차 블레어하우스 회의, 1, 2차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백악관회의 등을 거쳐 한국전쟁의 기본개념을 ‘제한전’으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장개석과 이승만의 북진론을 기반으로 반공전선을 동북아 지역 전체로 확대하고자 했다. 결국 이러한 대립
미국 대사관까지 침입하여 난동을 부렸는가 하면, 휴전회담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 6월 이승만 대통령은 25,000명에 이르는 반공포로의 일방적 석방을 단행하면서까지 미국 측의 휴전계획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에 미국 측은 휴전의 조기 타결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한국 측을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
미국에 가기 위해 비자를 신청하거나 영주권을 신청하기 위해 대사관을 찾는다. 이렇게 미국은 국제 사회에서 높은 권위를 누리고 있는 강대국 중 하나다. 과거부터 한미동맹관계를 바탕으로 한국과 군사적, 경제적 파트너이며 과거에는 한국의 최대 교역국가 였다. 따라서 한국과 미국은 과거부터 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일극체제의 새로운 이념으로 등장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물결이 물밀듯이 밀려와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모든 분야가 세계 속에 빗장이 풀린 채로 열려있는 평평한 세계가 되었으며,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중국, 인도, 러시아의 부상과 EU의 확대로 세계
세계대전 종전 당시 1천 2백만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미군은 종전 후 급속한 동원해체를 단행하여, 2년 후인 1947년에는 병력 규모가 불과 3백만명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국가 이익에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지역으로부터 병력을 철수하는 방안을 시도하였다. 이에 대해 주한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