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직 소설 연구』, 국학자료원, 2006, p.68.
라는 단체에 가입했고 1906년 6월 『만세보』 창간과 함께 주필을 맡아 활동하며 『혈의 누』외 많은 기사를 써 발간하였으며 『만세보』가 금전적인 이유로 문을 닫자 이를 인수하여 『대한신문』을 창간, 사장으로 취임한다. 1908년에는 『은세계』를 출판하
일본에 체류하다가 1904년 2월 일본 육군성 제 1군 사령부 소속 한어(韓語)통역관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그 뒤 《국민신보(國民新報)》의 주필과 《만세보》의 주필을 지냈다.
이인직이 작가로서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만세보》에 『혈의 누』를 연재하면서 부터이다. 또 190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
만세보사로 가 『만세보』를 창간함과 동시에 그는 주필의 자리를 맡게 된다. 그리고 『만세보』에 7월 20일부터 10월 10일까지 50회에 걸쳐 『혈의 누』를, 10월 14일부터 다음해 5월 31일 까지는 134회에 걸쳐 『귀의 성』을 연재했다. 또한 이인직은 『제국신문』에 1907년 『혈의 누』하편을 11회에 걸쳐
일본군 군의관이라는 설정이 이러한 친일 의식의 한 단면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선진 서구 문명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그것을 일찍 받아들여 개화문명에 성공한 일본에 대한 부러움의 한 표현이었다고 보여집니다.
Ⅱ. 신소설의 작가
1. 이인직 : 최초의 신소설 작가
* 혈의 누(1906년 [만세보] 연
작가들이 주로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왔고 거기에서 목격한 선진국 일본에 대한 동경이 큰 작용을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이인직의 '혈의 누'를 살펴보면, 청일전쟁으로 길을 잃고 헤매는 옥련을 구하고 나중에 양딸로 삼아 유학까지 보내 주는 사람이 다름 아닌 일본군 군의관이라는 설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