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호론이라고 한다.
18c 이전에도 인성과 물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본격적인 논의의 시작은 권상하의 문하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권상하는 기호학파의 맥을 계승한 인물이며, 인물성동이 논쟁의 주인공이 되는 이간과 한원진은 바로 권상하의 문인이다.이들의 실질
역학, 잡학 등 국정 운영에 필요한 학문의 발전을 가져왔다. 더불어 서인-남인 연립정권이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했기 때문에 퇴계 이황의 학문과 율곡의 학문이 활발한 교류를 통해 융합되는 면모를 보였다. 이는 후에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이론 확립에 큰 영향을 주었던 김창협으로 이어진다.
1. 논쟁의 발단
조선 후기 노론계통의 학자들 사이에서 사람과 사물의 성(性)이 같은가 다른가를 놓고 벌였던 논쟁(人物性同異)에 관한 논쟁으로,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한원진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호서지방에 거주하였고,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이간의 견해에 동
논쟁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에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수암 권상하(遂庵 權 尙夏, 1641~1721)의 문하에서 제기되어 본격화된다. 그의 문하에는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로 불리는 8인의 학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남당 한원진과 외암 이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