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구를 적절히 수렴하고 통제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집권세력 내부의 분열을 수습하지 못함으로써 정치적인 무능을 드러냈다. 갈등을 거듭하던 민주당은 1961년 2월 20일 윤보선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구파가 신민당을 창당해 이탈함으로써 지배구조와 통치권의 이분화를 가져왔다.
붕괴했다. 이 과정에서 윤보선은 자신의 비서를 1군 사령관에게 보내 쿠데타 진압을 포기하도록 하였고 미군의 진압군 동원을 거절하였다. 또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올 것이 왔다"며 쿠데타를 합리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를 두고 신파와 장면내각은 헌법을 지켜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매우 유감스러
제2공화국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1) 4.19 혁명의 원인
4.19 혁명의 원인은 자유당 이승만정권이 장기 집권을 하려고 이승만에게 엄청난 권력이 주어지는 대통령중심제를 실시하는가 하면, 3.15 부정선거를 일으킴으로써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결국 1960년 2월에 대구의 고등학
출범한 과도정부임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과업들에 대한 과감한 처리가 아닌, 비혁명적인 대처밖에 하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비혁명적 방법에 의한 혁명을 수행하겠다는 허정의 말과 그가 이승만의 측근이었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허정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정치적 입장을 지닌 사
총리로 임명되어 귀국할 때까지 주미대사로서 6.25에서 미국의 후원을 얻는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3) 이승만 정권에서의 국무총리
주미 대사로 활약한 외교적 공로는 그로 하여금 국무총리가 되게 하였고, 이것은 곧 이승만 다음의 지도적 인물로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장면이 국무총리로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