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을 맨 처음 개척하였다. 이는 천 년 전에 이루어진 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장보고는 진작부터 우리 역사상 특기할 만한 경이로운 인물로 주목되어 왔다. 실로 출자조차 분명히 전하는 것이 없었던 그가 황해를 가로질러 나․당․일본 삼국을 잇는 해상교역의 왕자적 지위에 오르고 또 신라
신라와 당을 이어주는 해상교통로의 요충이며 일본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이기도 했다. 따라서 동아시아 삼국간의 무역을 통하여 크게 성장한 장보고세력이 가장 좋아할 근거가 될 수 있는 지역이었다. 특히 산동반도는 고구려 유민 이정기 일가의 번진이 55년간이나 군림했던 매우 이질적인 곳이다.
일본의 북큐슈(九州)에 이르는 국제 무역항로의 중간 기항지였다. 장보고는 828년에 지방민 1만 명을 모집해 군사를 조직하고, 해군기지인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해적을 소탕하고 황해의 무역로를 보호하면서 서서히 동지나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당·신라·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
신라해적의 소행으로 일본연해지방의 경비를 엄하게 했다는 사실과, 경문왕 9년(869)에도 신라의 해적이 틈을 타서 일본지방에서 중앙으로 상공하는 물건을 약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사실들은 청해진을 본거지로 하여 장보고 지휘 아래 무역활동을 하다가, 청해진이 몰락하자 해상 질서도 어
청해진 대사가 되었다. 그 뒤 신라 서남해에 출몰하던 당나라의 해적과 일본 왜구를 모두 소탕하고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나라, 일본, 남방, 서역과 아랍의 여러 나라와 무역을 하여 많은 이익을 취하였으며, 아울러 큰 세력을 이루었다. 이때 신라의 국력이 잠시 회복되었다. 836년 흥덕왕이 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