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기 후반, 장보고는 그의 의형제인 '정년(鄭年)'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간다. 두목은 장보고가 서주(徐州, 강소성 서주시)에서 무녕군의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된 때의 나이를 30세였다고 하였다. 그가 30세에 무녕군 소장이 되었다면 완도에다 청해진을 828년에 설치하였으니 그가 당나라에 건너간 시기
왕 9년(869)에도 신라의 해적이 틈을 타서 일본지방에서 중앙으로 상공하는 물건을 약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사실들은 청해진을 본거지로 하여 장보고 지휘 아래 무역활동을 하다가, 청해진이 몰락하자 해상 질서도 어지러워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점은 장보고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완도
왕족이 이를 찬성하여 마침내 허용되었다. 흥덕왕에게서 1만 병사를 얻어 청해(淸海, 완도)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가 되었다. 그 뒤 신라 서남해에 출몰하던 당나라의 해적과 일본 왜구를 모두 소탕하고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나라, 일본, 남방, 서역과 아랍의 여러 나라와 무역을 하여 많은
왕경을 중심으로 한 신라 지배층의 토기문화였지만 통일과 함께 정비된 지방행정조직망을 따라 빠르게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처음에는 신라의 왕경과 그리고 멀리 떨어진 지방과는 토기의 제작과 사용에 있어서 수준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신라 하대에 접어들면 각 지방에서 성장한 호족
지도를 보면 산동과 우리나라는 황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무엇보다 거리에 있어 가깝다는 점과 우리의 역사 속에서 그 이름을 종종 접할 수 있었다는 친근함에서 우리 조는 산동이라는 지역에 접근하게 되었다. 조사를 진행하기 이전, 산동은 반도라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교역의 중심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