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 13일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하고, 8월 22일에는 평양에 도착하여 점령하였다.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에야 비로서 인천에 상륙하여 이튿날 서울에 도착하여 점령하였다. 미국과 소련 양군의 한반도 점령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점령당한 한국의 전후처리에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스탈린은 미국이 UN 군으로서 한반도에 주둔하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그래서 김일성의 계획을 반대하였지만, 내전을 끝낸 중공의 모택동은 전쟁을 적극 수용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결국 소련의 승인과, 중공의 대규모 지원을 약속받은 김일성은 남
기간으로 양측의 전선이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 이르렀을 때 미국 행정부는 한반도 내에서의 전력의 낭비는 유럽에서의 소련의 침공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판단 아래 전투 종결을 희망했으며, 이는 전쟁의 염증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이나 중국의 의도와도 어느 면에서는 일치하는 것이었다. 1951년 6
전쟁 중에 군인들만 죽거나 다친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많이 죽었다. 남북한의 전체 인구 3,000만 명 중 약 100만명이 죽거나 다쳤다. 또 부모를 잃은 아이들도 10만 명이 넘었고, 1,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족을 잃고 이산가족이 되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이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쏟아진 폭탄으로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한국의 분단을 현실이 되었다.
2. 분단한국과 이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입장
1) 미국미국의 대외정책의 특징은 크게 고립주의(Isolationism)와 개입주의(Interventionism)의 순환적인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들 내부의 문제가 강조될 때에나 국력이 약하다고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