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삼동회 회원들은 주위를 향해 소리 높여 그들의 요구를 외쳤으나 플래카드는 경찰에게 빼앗기고, 시위 역시 경찰의 방해로 인해 결국 무위로 끝나갈 즈음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분신자살하였다. 전태일 분신자살사건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
노동자들은 하루에 적어도 14~15시간씩 일을 하며 일감이 밀리면 그마저도 야근을 해서 수량을 맞춰야했다. 그에 비해 임금은 턱없이 작았다. 기초적인 인권조차 보호해주지 못하면서 노동자에게 무리한 일을 강행하게 했다.
현 정보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당연히 데모를 하거나 노동운동을
짧지만 배움과 그리고 친구들과 학교 생활을 경험했다. 우리에게 있어서 지극히 평범한 학교 생활이 그에게 있어서는 인생에서의 최대의 기쁨이었다. 그는 항상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다가 그는 평화시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그저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근로조건 개선 시위를 기도했으나 실패
1970년 11월13일, 오후 1시 30분경 평화시강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면서
분신을 결행, 밤10경 성모병원에서 불꽃으로 산화
2001년 1월 21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에 의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우리는 다시 대하면서 그의 죽음에 우리 모두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이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의문점이었고 나하고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로만 치부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전태일 = 노동운동가 = 분신자살 이라는 지극히 피상적인 사실만을 어렴풋이 알고있던 나에게 이번 노동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