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의사상을 완화시키고 자신의 집권을 불교의 운명론으로 합리화하려고 했다는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 유신세력의 불교배척 확립
예종이 즉위후 1년만에 죽고 성종이 즉위하는 동안 유신세력은 간경도감의 혁파를 주장하여 성종 2년 간경도감이 혁파되었다. 성종은 처음에는 대왕대비의 섭정
사상 정책의 일환으로 불교를 장려하였다. 결국 성종조에 이르러 다시 유학이 확고하게 정착하기까지는 불교에서 유학으로 넘어가는 하나의 사상적이 과도기였음을 알 수 있다.
매월당은 이렇게 濡佛이 상호 대립하면서 공존하는 양면의 시대를 살아갔다. 따라서 그가 승복을 걸치면서도 유학자로
절의와 광기를 말해준다.
김시습은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한자를 알았고, 세 살 때는 시구를 지을 줄 알았다. 다섯 살 때 세종의 칭찬을 받은 뒤로 사람들은 그를 오세라 불렀지,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사리를 알았던’ 공자의 환생이라고도 여겨졌다. 하
사상을 그리고 그의 일생을 잘 알 수 있다.
여기서는 고백록을 통해 나타난 어거스틴의 사상과 고백록에 대한 전반적인 요약과 함께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통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고백록의 기록목적
우선 고백록을 기록한 목적을 알아보고자 한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의 제 10권에서 고백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