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전 지역에서 장정들을 모아 육군과 해군을 조직하여 그리스를 침입하였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는 이 페르시아 제국의 병사 수를 거의 500만 명으로 추산하였다. 초기의 전세는 그리스 쪽에 불리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지원과 숙련된 기동 작전을 펼쳐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함에 따라 크
, 그리고 1539~42년에는 미시시피 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그사이 1513년 발보아는 파나마 지협에서 태평양을 발견했으며, 1519년 다빌라는 파나마 시를 건설해 태평양 연안지대 정복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어 1519~21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600명의 병사로 멕시코에서 아스테카 제국을 무너뜨렸다.
수 년여 간 이어지는 사이 장거리 대포, 전차, 기관총, 수류탄, 저격용 소총, 독가스, 전투기, 잠수함 등 그 동안 축적된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무기들이 다양하게 발명되었다. 제 1차 세계 대전은 또한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여 반제국주의 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병사 양병과 조세 의무는 회피하였다.
이로 인해 데브쉬르메 제도로 양성되어 조직된 예니체리들이 오토만군대의 핵심을 이루게 되면서 영향력이 급격히 커져서 술탄을 통제할 지경에 이르렀다. 본래 예니체리들에게는 독신주의 원칙이 적용되었으나 점차적으로 기강이 해이해져 이 시기에는 결혼
가문이 맡게 되었다. 재상은 술탄을 대신한 제국의 제2인자로서, 과거 술탄이 처리했던 국가 및 조정 업무를 대신하며 이에 관한 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제국 내의 다양한 민족과 집단의 정신적 구심점' 이라는 술탄의 상징적 역할
데브쉬르메와 하렘의 야합에 의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