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폭동사건’이라 하기도 하며, 1948 4월 3일을 기해서 제주도 전역에 걸쳐 남조선노동당 계열의 좌익분자들이 일으킨 대폭동을 ‘제주 4.3사건’이라 하기도 했다. 제주 4.3은 위와 같이 용어조차 정립되지 못한 채 '난리, 사태, 소요, 폭동, 반란,의거, 봉기, 항쟁' 등 논의가 분분하다. 어떻게 불러야
3일 미군정은 무장대에 대한 총공격을 경비대에 명령하였고 경찰 중심의 진압작전은 경비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미군정은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제주도 사태를 조기 진압하기 위해 강경진압으로 선회했지만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미달로 무효 처리 되었고, 재선거를 실시
오라리 방화사건’의 조작극과 ‘5․3 기습사건’ 등이 잇따라 발생, 평화협상의 진로에 찬물을 끼얹었다. 5월 5일 군정장관 딘 소장은 제주에서 최고수뇌회의를 주재하고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건의하다 조병옥 경무부장과 충돌한 김익렬 연대장을 전격 해임했다. 이로써 게릴라 측과의 평화협상은
2. 혁명적 변화
해방은 정치적인 혁명을 초래했다. 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도 혁명적인 사태가 급진적으로 전개 되었다. 그에 따하 노동자, 농민들이 역사의 중요한 주체로 격상되기 시작했다.
해방 후에 우리나나는 잃어버린 말과 역사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에 따라 36년간의 일제 잔
제주43 사건의 배경은 극히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착종되어 있어서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동북아 요충지라는 지리적 특수성이 있는 제주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6만여 명이 주둔했던 전략기지로 변했고, 종전 직후에는 일본군 철수와 외지에 나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