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3월에 ‘혁우동맹’을 결성하고, 1931년 5월에는 강창보를 책임자로 하는 ‘조선공산당 제주위원회(조공 제주도야체이카)’를 결성하여 제주도 전지역의 해방운동을 지도하게 되었다. 조공 제주위의 결성과 더불어 제주인들-특히 기층민중-의 반제투쟁은 격화되기 시작했다. 1931년 4월에 중면(현재
제주43사건(제주43항쟁)의 주체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로 본격화된 제주도민중항쟁을 살핌에 있어 소박한 수준이지만 당시의 직업구성을 중심으로 행위주체가 어떻게 조직으로 구성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여기에는 항쟁의 주체들뿐만 아니라 이를 공격하는 진압세력의 조직형태도 추적해 본다.
제주도사건 종합보고서’를 보더라도 앞에서 말한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당시 상황을 초기에 파악하고 현명하게 처리하였다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단순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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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제주43사건(제주43항쟁)의 역사적 의미
제주4
Ⅰ. 머리말
2013년은 제주4·3사건이 일어난 지 65년이 되는 해이다. 그런 탓인지 올해에 제주4·3사건을 소재로 ‘지슬’이라는 독립영화가 3월 21일에 개봉을 했고, 독립영화로는 최고의 선전을 한 채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현재의 사람들에게 내륙과 동떨어진 제주도에서 일어난 4·3사건은 생소하
제주43사건(제주43항쟁)의 배경
1947년에 들어서면서 미 군정은 철도노조파업, 정판사사건, 대구의 10월폭동 등의 영향으로 남한에서의 좌파세력 단속을 강화하였다. 이런 시기에 남로당 중앙당에서는 3.1절 기념대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할 것을 지시하였으므로 제주도 남로당도 대규모의 3.1절 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