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여만 명으로 총인구 대비 6.6%에 해당된다. 이는 10년 전보다 비율로는 2.0%, 신자수로는 110만여 명이 늘어난 것이다. 가톨릭은 여러 교단으로 분할되어 있는 불교 및 개신교와는 달리 조직력이 강한 단일교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적 성장에 대한 교계의 비판과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는 매우 짧
종교개혁을 촉진하는 신 교화정책이 추진되었으나 16세로 죽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제1왕비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 1세가 왕위(1553~1558)를 이어받아, 즉위 이듬해에 구교의 나라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한다. 그녀는 아버지와 이복동생(에드워드 6세)의 종교개혁 사업을 부정하며, 구교 부
제정시대에 걸쳐, 전쟁과 내정의 혼란을 거듭하던 프랑스에서는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의 《폴과 비르지니》, 스탈 부인의 《문학론:사회제도와의 관계에서 본 문학》 《독일론(獨逸論)》, 샤토브리앙의 《그리스도교 정수(精髓)》 이외에는 볼 만한 것이 없었으나 그 동안에 영국228;독일은 낭만
제 칼5세가 주재한 보름스 국회에 루터가 불려 갔을 때,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세속당국은 민중봉기가 두려워 로마의 종교재판에 넘기기를 거부하고, 그에게 다시 한 번 철회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험의 경고를 듣고서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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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시기의 유럽
당시 유럽의 중심은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영국,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였다.
다시 말하자면 전 유럽의 막대한 권력과 부는 이들 몇몇 소수의 나라들에 의해서 좌우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림잡아 인구 4백만의 영국, 인구 8백만의 스페인, 1천 6백만의 프랑스 시민, 1천 2백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