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박세교-박태길-박필균-박사유-박지원-박종채-박규수’로 이어지는 명문가이다. 5대조 박미는 금양위 (錦陽尉)로서 선조의 5녀 정안공주의 부마였고, 조부 박필균은 경기감사, 대사간, 호조·병조참판, 동지돈령중추부사를 지냈으며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우의정, 평안감사를 역임하였다. 어머니
박미와 같은 시문의 대가등이 배출된 명문가인 반남박씨 사유(師愈)와 함평이씨(咸平李氏) 창원(昌遠)의 딸에게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부모를 일찍 여의고 경기도 관찰사,예조참판,지돈녕부사를 지낸 조부 박필균(朴弼均)에 의해 양육되었다. 성장하면서 신체가 건강하고 매우 영민하여 옛사
却說李懷光見了陸贄, 力陳三害, 第一害是得克京城, 吐蕃縱兵大掠;
각설이회광견료육지 력진삼해 제일해시득극경성 토번종병대략
각설하고 이회광은 육지를 보고 힘써 3가지 해를 진술하니 첫째는 경성을 얻고 토번이 병사를 놔서 크게 노략질함이다.
第二害是吐蕃建功, 必求厚賞, 京城已遭寇掠,
却說朝鮮自迭遭亂事, 國勢愈衰, 國王李熙, 又是個貪安圖逸的人, 凡事都因循苟且, 不願振作, 因此日貧日弱, 寇盜紛起.
각설조선자질조난사 국세유쇠 국왕이희 우시개탐안도일적인 범사도인순구차 불원진작 인차일빈일약 구도분기
각설하고 조선은 번갈아 난리를 만나 나라 기세가 더욱 쇠약하고 국
<전략> 정(鄭)나라 어느 고을에 벼슬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학자가 살았으니 북곽 선생(北郭先生)이었다. 그는 나이 40에 손수 교정(校正)해 낸 책이 만 권이었고, 또 육경(六經)의 뜻을 부연해서 다시 저술한 책이 일만 오천 권이었다. 천자(天子)가 그의 행의(行義)를 가상히 여기고 제후(諸侯)가 그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