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말직에 머물다가 의금부도사, 한성부 판관, 안의현감, 면천군수등의 여러 관직을 거쳤다. 마지막으로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1805년 69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이상으로 정리 하자면, 연암의 생애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제 1기는 과거를 포기할 때까지의 문장 수학기로
> <호질> 등을 지어 세태를 비평하기도 하였다. 50세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몇몇 관직을 거쳤고, 늘그막에 <과농소초>라는 농업 연구서를 지어 정조에게 바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박제가·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이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으며, 세상을 떠난 뒤에 정경대부라는 벼슬이 내려졌다.
등과는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대하여 자주 토론 하였으며, 이 무렵 유득공, 이덕무등과 서부지방을 여행하였다. 이 당시의 국내정세는 홍국영(洪國榮)이 세도를 잡아 벽파(僻派)에 속했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어 결국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
연암은 마침내 과거를 보지 않기로 결심하고, 1772년과 73년 무렵에 처자를 경기도 광주 석마가로 보낸 뒤 서울 전의간동에 혼자 은거하면서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정철조등을 비롯한 많은 젊은 지식인들과 더불어 학문과 우정의 세계를 펼쳐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하였다.
세상을 등지고
박지원을 만나게 되고, 박지원의 사상을 배우게 된다. 20세때는 첫 시집을 엮기도 하는 등, 18세 때부터 검서관(檢書官)이 되던 30세까지 자신의 예술적, 학문적, 사상적 기초를 닦았다. 그는 29세 때 이덕무와 함께 청나라 연경에 가서 청의 문물을 접하고, 이조원, 반정균 등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