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의 측근이었던 이동화는 그가 좌우합작운동에 나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당시 정세 아래서는 미군정과 대립하여서는 아무일도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였을 뿐 아니라 어떠한 방법이든 간에 첨예화한 좌우익의 대립을 완화시켜 정치적 안정을 이룩해야 할 간절한 필요를 느끼고 있던
5. 좌우합작의 실천과정
좌우합작 운동에 있어서의 ‘좌’와 ‘우’의 개념은 극좌와 극우를 제거한‘온건좌’와 ‘온건우’만을 지적하는 극히 제한된 것이었고, 미군정측이나 여운형, 김규식이 지향한 첫 단계의 목적은 온건세력을 총망라 하여 단합하는 것이었는데, 한국인사들은 이 단합된 세
좌우 합작 단체임
1945년 8월 15일 일본패망 소식에 조선총독은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를 위한 준비
→한반도에 대한 권리를 넘겨주는 대신에 안전한 일본 귀국을 약속 받고자 함
치안권을 이행하기 위해 각 지방에 지부(치안대)를 조직 : 145개 지부 결성
→치안대는 자치적인 성격으로 그 지방
좌우익을 통합한 좌우합작구상을 통하여 한반도의 정치적 분열을 막아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 우리는 해방 후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1946년 5월부터 1947년초까지의 시기를 통하여 좌우합작의 주역이었던 미군정과 중도파의 입장을 중심으로 그들이 어떠한 구상을 하였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