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의 거주지화 하려는 것이었다.
티벳에 대한 회유정책은 민족정책과 경제정책의 두 가지를 중심으로 했다. 먼저, 민족 정책은 불교사원의 재개, 새로운 승려의 육성, 티벳어 인쇄물의 배포인정, 현지의 중국인 간부들을 대거 티벳인으로 교체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서 티벳 문화와 종교 활성화
티벳인, 몽골인, 버마인은 중국인과 인종적으로 유사해 보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중국인은 티벳인을 얼굴만 보고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이것을 볼 때 중국인과 티벳인은 인종적으로 공통적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공통의 영토, 공통의 언어, 공통의 법, 공통의 역사의식과 문학, 약간의 종교적 유사
중국에 이롭지 못한 조약들을 모두 불평등조약으로 규정하고 이것을 시정하기 위한 투쟁을 선언하였다.
중국의 티벳 점령 이후에도 티벳인의 저항은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중국인에 의한 티벳 사회의 개혁은 종교적 명사와 사찰에 대한 잦은 공격을 동반하였기 때문에 점차 거친 반
중국민족정책의 골자는 각지의 소수민족의 정황이 각기 다르므로 중요한 문제는 중앙에 보고하여 처리하나 기타 문제는 각 지구가 독단적으로 처리할 것을 훈령하였다. 특히, 각 소수민족지구에서의 사회개혁을 추진하는데 있어, 그 민족의 종교, 풍속, 습관 그리고 현존하는 토지제도나 세수구조 등
티베트는 조국을 잃었다. 중국은 티베트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티베트인에게서 거주 이전과 여행의 자유를 박탈한다. 티베트 망명정부 집계에 따르면 중국의 티베트 침공 이후 1979년까지 120여만에 달하는 티베트인이 목숨을 잃는다. 종교는 우리 유물론자의 적이라고 믿는 중국인들에 의해 티베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