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이롭지 못한 조약들을 모두 불평등조약으로 규정하고 이것을 시정하기 위한 투쟁을 선언하였다.
중국의 티벳 점령 이후에도 티벳인의 저항은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중국인에 의한 티벳 사회의 개혁은 종교적 명사와 사찰에 대한 잦은 공격을 동반하였기 때문에 점차 거친 반
1950년 4만명이 넘는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티베트로 진주한다. 당시 독립국가였던 티베트는 8,000여명의 병사로 맞섰으나 대군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티베트는 유엔을 통한 외교적 중재 노력에 한가닥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전쟁으로 정신이 없던 국제 사회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여유
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칸트와 동북아시아 평화
-1913년 스탈린은 “민족이란 인간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공통 언어, 공통 지역, 공통 경제 생활 그리고 공통된 민족 문화 특징 위에서 표현되는 공통 심리 소질을 지닌 하나의 안정적인 공동체”라 정의하였는데 중국은 이 정의를 차용하였다. 중국 민
Ⅰ. 티베트(티베트자치구, 티벳)의 역사
티베트족은 한대(漢代)에 섬서(陝西), 감숙, 사천 지방에 살며 저 또는 강이라 불리던 유목민족으로, 여러 파로 나뉘어 중국의 서부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해오다가, 6세기 말 중앙티베트의 토번(吐蕃,Tufan) 왕국에서 송첸 감포(Sungtsan Gampo, 581 ~649, 제위618~49)라는
침략을 이민족 거주지역의 영구점령통치를 통해 해결하려 하고 있다. 근래 티벳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의 탄압은 식민지배를 겪었던 우리민족에게는 분노를 자아내게 했지만, 중국 당국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다. 중국은 수 천 년 간 자신을 괴롭혔던 모든 요소들을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