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정책의 토대를 다지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만선사관이라는 역사관이 만들어졌다. 일선동조론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일본 안에서 근대 사학이 발전하였다고 하여 국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연구가 완전히 타파된 것은 아니었다. 에도 시대 국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 주장을 일제는 한국 병탄을 합
사회발전론에 입각한 중심인물의 설정은 신민, 소년, 청년 등을 거쳐서 1920년에 들어서면 중추계급의 설정으로 나타난다. 중추계급론은 역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에서 정형화 된다. 이광수의 사관은 엘리트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중추계급의 일반적 가치부여와 함께 식민지조선
한국사의 타율성’을 강조하는 역 사성을 만들었다.
<2> ‘일선동조론’의 강한 대두
이것은 에도시대 국학자들의 전통을 계승발전 시킨 사상이다.
“일선동조론” 그 뒤 3.1운동의 발발과 함께 이를 무마 하는 이런으로 다시 강렬하게
고조된다.
<3> 식민지 사관의 근간을 이루는 ‘정
일본의 지배 하에 있었다’는 점을 일선동조론의 주된 논거로 삼는다. 그는 또한 양국인의 언어구조가 동일하였다는 주장으로 자신의 논거를 보강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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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식민주의사관(식민주의역사관, 식민사관)의 정의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을 흔히 ‘식민사관’이
사회를 해석했고, 그를 통해 우리나라의 민족의식을 말살시키고 더 나아가 일본인으로 동화하여 필요에 따라 전쟁에 동원하기까지의 목표를 품고 있었다.
이러한 목적성이 뚜렷한 역사관이 바로 식민사관으로, 식민사관은 해방 이후 한국 사학계의 노력으로 인해 많은 연구업적을 통해 해소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