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 따른 중국군대의 참전은 대다수 중국출신이었던 화교들의 입지를 더욱 악화시켰으며 특히 한국전쟁 중 ‘창고봉쇄령’은 당시 무역업에 종사하던 화교들의 경제권을 거의 무력화시켰다. 이로 인해 화교들은 음식점, 잡화점 등 특정직업에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났으나 이것도 당시 정부의
화교 사회는 더욱 어렵게 되었다. 더불어 1949년 중국정부가 설립되어 외국이동을 금지하면서 더욱 쇠퇴했다.
지난 120여 년의 한국화교경제는 19세기 말, 1920년대, 해방 초기에 크게 융성하여 한반도의 경제를 위협할 정도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각 시기 화교경제의 융성은 대중수입 무역을 근
한국내의 화인 자본
한국 내 화교들의 직업은 2002년 말 기준, 요식업 30.5%, 의약업 26.8%, 무역업 18.9%, 여행업 4.3%, 언론 및 교육 3%, 기타 16.5%로 나타났다.
1990년대 중반 화교경영 무역회사가 약 20개에 달했지만, 대부분 소규모로 평균 자본금이 약 1억원 이하였다. 1997년 중국과 활발하게 교역하면서 동
화교들과 비교해 볼 때 한국화교들이 수적으로는 부족한 감은 없지 않아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 살고 있는 화교들은 한국화교들만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 있는 화교들은 대부분이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으며 한국의 서민 계층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고 왕래도 잦다. 한국인들은 중국인
화교경제는 일제 식민시기를 거치면서 그 규모를 더 확대하였으며 특히 무역업 분야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굳혔다. 화교들이 이처럼 확고한 경제력과 중국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이들을 대국인으로서 상당히 존중하였다. 그러나 1940년대 중반 이후 한반도에 냉전 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