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문, 남문을 팔달문, 서문을 화서문, 동문을 창룡문이라고 지었다. 장안문이 정문이다. 성문에는 각기 옹성을 쌓았다. 성문 밖으로 둥글게 겹으로 성벽을 쌓은 것이다. 그리고 네 군데 성문 외에 다섯 곳에 암문을 내었다. 암문은 일종의 비밀 출입구. 한편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개천 위에는 각기 북
1. 시작하는 말
中世社會의 解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던 18세기 말 水原地方은 行政邑治의 移轉. 昇格과 화성축조를 계기로 일대 변화를 맞이하였으며, 이러한 수원지방의 社會的. 行政的 대변화의 첫 번째 계기는, 정조 13년(1789) 7월 亡父인 莊獻世子(장헌세자)의 陵墓(능묘)를 구읍의 主山이며
1. 화성(수원성)을 문화 유적지로 선정한 이유
"가까운 주변에 있는 문화유적지를 둘려보고 레포트를 써오세요∼"라고 하시는 교수님의 말씀에 나는 얼른 머리를 굴려보았다. 차가 있는 것도 아니니 대중 교통을 이용하면서도 가깝고도 의미 있는 곳으로 답사를 떠나기를 말이다.
그러던 중에 화성(
● 그 외 학자들.
그 외 관련된 학자를 들자면 실학자인 반계 유형원이 수원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으로 물자가 소통되어야 하는 위치임에도 산이 막혀 그러질 못하여 경제유통의 역할을 하는 자리로 해야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정약용과 함께 수원화성을 설계하였다. 채제공은 영중추부사로
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 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