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17년 1월 留守府(유수부) 승격과 더불어 행궁과 여러 관아들을 크게 증축하여 小京으로서의 체모를 높이는 한편, 국력을 기울여 이듬해 2월말부터 동왕 20년 9월 상순까지 2년 7개월에 걸쳐 園寢(원침)과 行宮의 수호를 위한 華城(화성 : 수원성)이 축조되었다. 이 역사적인 築城作業이 성공을 거두기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암문을 내었다. 암문은 일종의 비밀 출입구. 한편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개천 위에는 각기 북수문과 남수문을 세웠다. 특히 북수문 위에는 화홍문 누각을 올렸다.
북문과 남문 좌우에는 각기 대칭으로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적대를 놓았다. 높은 위치
찾아보기 어려운 색다른 면모가 많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면모는 성벽자체에서부터 그 자재와 모양 하나 하나에까지 나타나는데 특히 벽돌의 방대한 사용과 치성과 적대, 포루, 공심돈 등의 도입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아래에서는 화성의 시설물을 중심으로 이러한 특징을 찾아보려 한다.
수원화성을 설계하였다. 채제공은 영중추부사로 축성을 총괄하였고 휘하에 조심태가 축성을 지휘하였다.
[정조의 수원화성 활용]
임진왜란 당시 방어체제가 크게 무너진 나머지 정조는 성을 쌓기로 한다. 위치를 고르던 중 아버지 무덤을 배봉산에서 수원 고을이 있는 화산 아래로 옮기고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