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는 어떤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을까? 최근 북한에서 펴낸 조선력인명사전에 황진이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북한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전에서는 황진이를 “이조 전기의 여류 음악가, 중종 때 개성의 이름 난 기생이며 노래명창이다”라고
황진이는 생몰연대 미상의 조선 중종 때 명기(名妓)이다. 개성 출신으로 본명은 진(眞) 일명 진랑(秦朗)이며 기명은 명월(明月)이다. 그에 대한 직접 사료는 없고 다만 간접 사료로 <송도기이松都奇異>, <어우야담於于野談> 등의 야사에서 각양각생으로 전해지며 지나치게 신비화시킨 흔적이 보여 허실을
Ⅰ. 서론
시조는 오랜 전통을 지닌 한국의 고유시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적 유산이 깃들어 있다. 시가를 사상·감회·정조 등을 운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때 그 작품 속에 담제나 내용도 개성에 따라 다양성을 띄고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특정의 작가 층
(1) 無常(무상)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거든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황진이의 시조
이 시조는 황진이가 자신의 스승이었던 서경덕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것이다. 산은 자연을 뜻하며 이는 변하지 않으나 사람의 인생을 나타내는
ⅱ. 당시의 평가와 현대의 평가
당대 황진이의 명성은 여러 문언에서 언급되었다. 황진이는 가무음곡에 빼어나고 해박한 상식과 뛰어난 문장력을 갖춰 당대의 재사들과 시문으로 화답하는 명기로 이미 정평이 나 있었으며, 전국의 재사들이 모인 화려한 연회장은 당대의 명기 황명월(황진이의 기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