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 페위 사건과 이를 은폐하기 위해 왕권강화에 긴박한 태종의 정치적 입장을 살펴보고, 그 다음 폐세자의 원인으로 알려진 세자의 실행과 품위손상의 내용과 함께 충녕대군이 차츰 부상하는 과정을 밝히며, 끝으로 세자 제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우는 과정과 그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REPORT
나의 뿌리를 찾아서
◎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
▶전주이씨의 유래
전주 이씨는 전주(全州)에서 대대로 살아왔다. 시조(始祖)의 휘(諱)는 한(翰)이며 호는 견성(甄城)이다. 시조께서는 덕망이 높고 문장이 뛰어나 신라 때 사공(司空)벼슬을 지내시고, 태종무열왕의 10세손이며 군윤(軍尹)벼슬을 하
효령대군은 90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칠 때까지 무려 9명의 왕을 섬겼다. 왕위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대군의 위치에 있었지만 왕위를 탐내기 보단 평생 왕권을 수호하는데 힘을 쏟았다. 게다가 왕자로서 누릴 수 있는 세상의 공명과 부귀영화를 저버리고 초탈한 삶으로 오직 왕실의 번영과 나라의 발전
대군에게서도 강하게 전해졌다. 이처럼 조선 초기의 회화는 세종조부터 왕실의 애호와 후원 아래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세종조와 문종조에 걸쳐 팽배하였던 왕실의 회화에 대한 애호와 후원은 세조조 이후 잠시 주춤하다가 성종조와 연산군에서 다시 활발해 졌다.
이밖에 효령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