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황정견(黃庭堅)
1. 생애
황정견(1045~1105)의 자는 魯直이고 호는 山谷 江西 修水縣 사람이다. 소문사학사의 한사람인 그는 스승 소식과 함께 시, 사 등에 걸쳐 가장 탁월한 업적을 남겨 소식과 더불어 ‘소황(蘇黃)’이라 불렸다. 특히 그는 환골탈태를 주창하면서 새로운 시경을 개척하는 한편,
李荇)·윤은보(尹殷輔)·신공제(申公濟) 등이 펴낸 관찬지리서.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87년 제주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 도망 온 범죄인을 심판하러 오는 관리
이 되어 부임하였다가 부친상으로 돌아오던 중 표류하여 중국 명(明)나라를 거쳐 6개월 뒤 귀국하였다. 그때의 경험을 성종의 명으로 《표
入夜高風捲暝煙 어두운 안개. 어두컴컴한 연무. 즉 티끌 따위가 대기 중에 떠서 뿌옇게 흐려 보이는 현상.
밤들자 높은 바람 어두운 안개를 걷어내네.
입야고풍권명연 (밤들자 높은 바람 구름을 쓸어)
夢覺曉鍾寒徹骨 새벽 종소리에 꿈깨니 싸늘함이 뼈에 스미는데
몽각효종한철골 (새벽 종소리 싸느
신비에 쌓인 대조선의 역사 72가지
[1. 현중국인의 증언]
1. 현중국의 한 학자가 한글재단 이사장에게 말하였다.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를 감추고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주)"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 박사가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당시 
유교적 윤리 정치를 이상으로 내세운 조선왕조는 국초부터 인재의 양성과 교화를 위한 학교를 중시하고 또한 이의 확립에 주력하였다. 그것이 성균관과 四學, 지방의 향교로 대표되는 관학적 교육제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교육제도는 그것이 운영되어 가는 과정에서 교화적 성격보다는 관리양성기구